@pixabay

윌리엄 새들러(이하 새들러)의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이하 서드에이지)’라는 책을 여러 회에 걸쳐 살펴보고 있다. 이하의 내용은 새들러의 책을 단순 요약한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설명을 더하고 필자의 시각으로 코멘트를 붙인 것이다. 오늘은 6가지 조화에 대한 내용 중 세 번째, 네 번째를 전한다.

세 번째 조화: 자신에 대한 배려 vs 타인에 대한 배려

세 번째 원칙은 배려에 대한 것이다. 특이할 만한 것은 새들러는 이 '배려심'을 2차 성장의 키워드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자신에 대한 배려와 타인에 대한 배려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자 하는 것 같지만, 자신과 타인에서 시작한 배려의 관점은 사회에 대한 배려까지 포괄하고 있다. 자신→타인→사회로 넓어지는 관점의 변화가 1차성장이 이루어지는 청소년기와 대비되는 점이 아닌가 한다. 1차성장기는 사회→타인→자신으로 줌-인되며 자아를 발견하고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과 상대적이다. 사회에 대한 배려라는 점은 2차 성장기에는 미래세대까지 포괄하는 동반성장과 관련있음을 시사한다. 새들러의 저술에는 일부러 연결하고 있지 않지만, 이점은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 중 '자아실현'과도 상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40대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 통념상 "저런 생각으로 40년을 살았는데 변하겠어?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잖아"라고 말한다. 그러나 2차성장으로 시작하는 서드에이지에서 변화될 수 있다. "세살 버릇 마흔에 고치고 여든까지 간다"는 발상 또한 불가능하지 않다. 문제는 자신→타인→사회로 관점을 변화시킨 후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이기심이 문제다. 자신이 변화하려하지 않으면서 타인이 자신을 위해 변화하거나 사회가 자신에게 맞춰주기를 바라는 심보다.

이기심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갓난 아기보다 못한 미성숙한 생각이다. 적어도 갓난 아기는 자신이 보호를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약자인데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것을 '순진무구', '천진난만'이라 표현하는데 서드에이지에 도달하고도 이를 미덕으로 알고 있다면 세컨드 에이지에서 멈춰버린 것 아닌가? 살아서 화석이 되어버린 이에게는 긴 인생이 어떤 의미일까? 이런 점에서 자신을 더욱 돌아보며 자신을 배려하는 법을 찾고 배워야 한다. 또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때 타인을 더욱 사랑할 수 있다.

새들러는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드에이지의 도전과제는 다양한 종류의 보살핌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면서  "서드에이지에 달한 다수 성인들이 2차 성장을 지속해가며 다양한 베풂을 통해 창조적 균형을 배운다면 보다 배려하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 앞장서게될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배려는 이기심이나 방종과는 다른데, 이는 다른 사람을 보살피려면 자기 자신을 먼저 배려할 필요가 있어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배려는 자기자신을 넘어 자신과 미래세대, 지구와의 연관성까지 방향이 맞춰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네번째 조화: 용감한 현실주의 대 낙관주의

또 새들러는 서드에이지 초의 2차성장기에 낙관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낙관은 막연한 긍정, 청년기의 미숙함과 이상주의와는 다른 성숙한 낙관이다. 세컨드 에이지를 진행하며 비관주의와 냉소주의는 몸에 배게 된다. 비관과 냉소는 무모한 모험과 일탈을 막아 실패를 미연에 방지하기 때문이다. 치기어린 상상과 행동은 다양한 시행착오를 불러온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발달하는 합리적 사고 속에 비관과 냉소가 자리잡는다. 힘이 넘치는 엔진에 엑셀만 달려선 위험하다. 브레이크가 없어 멈추지 않는 자동차만큼 위험한 탈 것이 있을까?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성장은 불가능하다. 낙관주의는 배가 항로를 유지하게 하는 미풍과 같기 때문이다. 합리적 사고를 위한 비판과 냉소를 가한 것인데, 비판과 냉소가 커지기만 하면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게 된다. 차 떼고 포떼고 하나씩 떼다보면 아예 장기를 둘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도 조화로운 삶의 자세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자, 여기서 최근 청년층에서 유행했던 몇 가지 키워드를 떠올려보자. 2015년에는 '맨스플레인'이란 말이 대두되었다. 원래 이 말은 ‘남자’란 뜻의 ‘man’과 ‘설명하다’라는 ‘explain’을 합성한 말로 여자들에게 아랫사람 대하듯 사사건건 가르치려 드는 남자를 비꼬는 말이다. 여기서 질문. 어떤 이들이 사사건건 남을 가르치려 드는가? 그리고 왜 사사건건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에 대해 반감을 가질까? 게다가 하필이면 ‘아랫사람 대하듯 사사건건 가르치려 드는 것’을 문제삼을까?

가르치려 말고 격려하라

어느 전직 대통령도 자주 썼던 말인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표현만큼 위험한 멘트도 드물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은 늘 "그거 해봤자 안돼"라는 부정적 단정으로 연결된다. 어느 누가 이런 말을 듣고 싶어할까? 도전하려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공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부정적 단정은 듣고 싶지도 않고 들을 필요도 없다. 차라리 도전에 실패하더라도 실패를 통해 얻는 교훈이 더욱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본인이 자신의 문제라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고 현명하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멘토라는 숭고한 정신을 갖고 살아간다.

그래서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2016년에는 '꼰대', '개저씨'라는 보다 직설적 표현이 등장했다. 연배가 있으신 분들도 '꼰대'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고, '개저씨'는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개+아저씨'라는 합성어임을 눈치챌 것이다.
이런 언어현상은 신세대와 구세대의 세대차이, 세대 갈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 스스로가 인간들의 사회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장수시대가 열렸음을 인지하고 학습했기 때문이다. 50년, 100년 전처럼 단명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적 젊음이 오랫동안 유지되어야 함을 서로에게 경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격려하며 성장하고 있는가

자기자신이 서드에이지를 살고 있고 아직도 2차성장기를 보내고 있다는 점을 알아챘다면, 스스로 점검해보라. 매사 비관과 냉소로 점철되어 있는지를 성찰해보면 될 것이다. 또한 성공의 방법론을 알고 있는지, 이어 성공의 방법론이 계속 작동될 수 있도록 명확한 비전제시가 가능한지, 적절한 비판과 격려도 할 수 있는지 성찰해보라.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는지도 자문자답해보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미 건강한 2차성장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니 안심해도 된다. 또한 이런 2차성장의 결과물들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무럭무럭 자라나 삶으로 나타날 것이라 기대해보자.
다음 회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원칙들도 알아보자.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민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