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1251년 - 팔만대장경 조판 완료

몽고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이 1251년 9월 25일 완성됐다. 고려 현종 1011년 완성된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자 1236년 대장도감과 분사도감을 설치해 대역사(大役事)를 시작한 지 16년 만의 일이다.

가로 24cm, 세로 69cm, 무게 2.4~3.75kg인 경판 8만1340장을 책으로 엮을 경우 6815권이 될 정도의 방대한 분량이다. 전체 무게는 26만kg으로 4톤 트럭으로는 65대의 분량이다. 

팔만대장경은 글씨가 아름답고 오탈자가 전혀 없어 동양에 남아있는 3000여 종의 한역 장경 가운데 가장 완벽한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평가받아 지난 1995년 12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 대장경은 고려시대에 판각됐다해서 고려대장경으로, 판수가 8만여 판에 이르고 팔만사천 번뇌에 대치하는 법문을 수록했다해서 팔만대장경으로 불린다. 이밖에 몽고의 침입으로 다시 새긴 대장경이라해서 재조대장경, 그리고 현재 해인사에 보관돼 있다해서 해인사 대장경 등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왕조가 피난했던 강화도에 보존되다 1398년(태조7년) 서울 지천사를 거쳐 그해 가을 해인사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장경이 장기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해인사가 대장경을 보관하는 데 필수조건인 습도와 통풍이 자연적으로 조절되는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다.

해인사 장경고는 자동적으로 습기를 조절할 수 있도록 땅에 숯과 횟가루, 찰흙 등을 넣어 다졌는가 하면, 판전의 창문도 통풍이 잘 되도록 과학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져 판본 보존 창고로는 이상적인 건물이다. 또한 대장경의 목판재료를 바다에 3년 담갔다가 그늘에 3년 말린 후에 사용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뒤틀림 없이 원형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진=위키백과

1881년 - 중국 문학의 아버지 ‘루쉰’ 탄생

루쉰은 중국의 소설가이다. 본명은 저우수런으로, 자는 예재(豫才)이고 루쉰은 새롭게 지은 필명이다. 이외에 영비(令飛), 하간(何干) 등 100개가 넘는 필명을 사용하는 등 반정부 논객으로 주로 활동했다. 신문학 운동가 중 하나였던 저우쭤런과, 생물연구자 저우젠런은 그의 남동생이다.

루쉰의 대표작으로는 ‘아큐정전(阿Q正?)’과 ‘광인일기(狂人日記)’ 등이 있는데, 특히 단편소설인 ‘광인일기’는 중국 봉건의 상징인 유교를 강력하게 비판해 피압박 민중의 행동과 각오를 촉구하는 등 1918년 ‘새청년’에 실린 신문화운동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신문화 운동의 영향을 받아 문어(文語)가 중심이 되던 중국 소설에서 벗어나 백화(白話)를 위주로 했다는 점, 제국주의 침략과 잇따른 혁명 과정에서 들춰진 중국 사회의 병태 혹은 그늘을 광인의 시각을 가져다 풍자해보려고 했던 글로 반향을 얻었다.

루쉰은 강소성 남경에서 학업을 시작했으며 육군학교 부설 노광학당에서 독일어를 비롯해 물리, 지질 등의 새로운 서양학문을 접했다. 이후 190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2년째 되던 해 그만두고 문학 활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중국인의 정신을 변화시키는데 문예가 가장 적당한 수단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8년간의 일본 유학을 청산하고 귀국한 루쉰은 잠시 교직에 몸담은 뒤, 중화민국임시정부의 교육부에서 일했다. 1918년 친구의 권유로 신청년에 단편소설 광인일기를 실었다. 이것은 작가로서 출발한 첫 작품이었다. 1921년 베이징의 신문 천바오 부록판에 연재된 아Q정전은 신문학의 승리를 확인하고 또한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중국은 국가 차원의 문학상으로 루쉰의 이름을 건 ‘루쉰문학상’을 만들어 작가들을 대상으로 수상하고 있다. 1988년 태백산맥, 아리랑을 쓴 소설가 조정래 작가가 우리나라에서 이 상을 처음으로 수여받았다.

사진=뉴시스

1882년 - 태극기 일본서 최초 게양

일본 고베의 니시무라야(西村屋) 옥상에 대한민국 태극기가 내걸렸다. 이는 사상 처음 태극기가 일본 땅에 게양된 것으로, 박영효, 서광범, 김옥균 등 수신사 일행이 고종이 직접 지시한 대로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 직접 제작했다.

1882년 고종은 조선의 왕을 상징하는 어기(御旗)인 ‘태극 팔괘도’를 일부 변형해 태극기를 제작하게 했다. 특히 태극기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해 백성을 뜻하는 흰색과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 임금을 뜻하는 붉은 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이는 고종이 계승하고자 했던 정조의 군민일체(君民一體)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 깃발은 일본 제국의 국기와 비슷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에 김홍집은 “반홍반청(半紅半靑)의 태극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구분될 것”이라고 제안해 태극기 문양이 정해졌다.

한편 국왕을 상징하는 어기가 아닌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만들게 된 계기는 청나라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라는 글과 함께 4개의 발을 가진 용 모양을 제시해 놓은 데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 제독은 조선이 청나라의 '황룡기'와 비슷한 깃발을 게양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정책에 위배되는 처사라고 생각하고,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에게 지시해 직접 배 안에서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도록 했고, 9월 박영효 등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될 때도 일본의 증기선 메이지마루 배 안에서 직접 태극기를 그렸다. 고종의 명을 받아 처음 제작되고 사용된 태극기는 1883년 3월 6일(고종 20년) 정식으로 ‘조선국기’로 채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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