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마광수/ 페이퍼로드/ 1만2000원

‘마광수 시선’이 나왔다. 마광수(66)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40년 시작을 결산한 자선 시집이다. 마광수는 1977년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시집 8권을 냈다. 이번 ‘마광수 시선’은 성적 욕망의 자유로운 표현은 물론, 다양하고 진지한 문학적 탐구를 스스로 골라 담았다.

‘내 자서전에서 독자들은/ 너무나 고상한 지식인 사회에/ 섞여 살며 힘들어 했던/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슬퍼하는 사람과// 으리으리한 교회 앞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 가슴 먹먹해 하는 사람과// 사람은 누구나 관능적으로/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내가 쓸 자서전에는’ 중)’

시각은 지배 엘리트층이 아닌 민중을 향한다. ‘역사’라는 시가 보기다. ‘역사책은 참 이상하다/ 왕과 장군의 이름만 나온다.// 워털루 전쟁 대목에서도,/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졌다”라고만 돼 있다.// 어디 나폴레옹이 싸웠나?/ 졸병들이 싸웠지.// 역사책 어느 페이지를 들춰봐도/ 졸병 전사자 명단은 없다.’

‘경복궁’도 마찬가지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수없이 강산도 바뀌어/ 왕들은 죽어버려 백골조차 없지만/ 그 어린 궁녀들도 외로이 늙어죽어/ 불쌍한 모습조차 찾아보기 어렵지만// 경복궁 근정전에서는/ 아직도 정액 냄새가 난다 피 냄새가 난다/ 조선조 이씨 왕족 놈들의/ 그 탐욕의 냄새, 그 음흉한 냄새가 난다’…

마광수는 ‘인간에 대하여’, ‘운명’, ‘성애론’에서 동서의 문학·역사·철학 고전을 가로지르며 인문학적 통찰을 보여줬다. 인문학적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쉽고도 품격 있는 에세이를 써왔다. ‘잡초’ 같은 시는 그의 노장적 자연관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얼마 전에 나는 마당의 잡초를 뽑았습니다/ 잡초는 모두 다 뽑는다고 뽑았는데/ 몇 주일 후에 보니 또 그만큼 자랐어요/ 또 뽑을 생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체 어느 누가/ 잡초와 화초의 한계를 지어 놓았는가 하는 것이에요’

‘사치’는 곧 천진난만한 시적 감성이다. ‘지난번, 집중 폭우가/ 쏟아지던 날/ 지붕이 새서 천장으로 빗물이/ 뚝 뚝/ 떨어졌다./ 나는 떨어지는 비를/ 대야에 받았다./ 그때 갑자기 어릴 때 기억이 떠올라/ 대야 위에 종이배를 띄우고 싶어졌다.’

검찰은 소설 ‘즐거운 사라’가 외설이라는 이유로 1992년 마광수를 구속했다. 이 사태는 시 ‘사라의 법정’을 낳았다. ‘재판장은 근엄한 표정을 지어내려고 애쓰며/ 피고에게 딸이 있으면 이 소설을 읽힐 수 있겠냐고 따진다// 내가 ‘가능성’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을까/ 또 왜 아들 걱정은 안 하고 딸 걱정만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왼쪽 배석판사는 노골적으로 하품을 하고 있고/ 오른쪽 배석판사는 재밌다는 듯 사디스틱하게 웃고 있다// 포승줄에 묶인 내 몸의 우스꽝스러움이여/ 한국에 태어난 죄로 겪어야 하는 이 희극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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